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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소도시 여행 ■■■/독일

[독일 바이에른]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칼을 뽑다, 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하늘연못

 

1517년 10월 31일, 대학교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는 <95개 조문>을 통해 당시 부패했던 로마교황청에 대한 살벌한 비판과 동시에 새로운 교리를 주장했다. 루터의 복음은 당시 교황에 억눌러 있던 독일의 제후, 시민계급 그리고 인문주의학자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세력이 확장되어 갔다. 그러자 로마교황청은 루터의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탄압했다. 루터 역시 로마카톨릭에 맞서 이곳에서 종교개혁을 전개했다. 두 종파간의 갈등이 커지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의 복음주의도 로마카톨릭처럼 하나의 종교로 동등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운동은 바이러스처럼 주변으로 전파되어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뱅이 종교개혁을 시도한다. 이로써 동방정교회와 로마카톨릭으로 양분되어 있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로 한 번 더 분파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로마 교황청도 그간의 부패를 청산하고 자숙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손님 20분 후 목적지에 도착이니 잠에서 깨어나 내릴 준비를 하세요." 독일어를 알아들을 리 없지만 눈치껏 이런 내용일 것이다. 철도원은 내가 내려야 할 역 20여분 전즘 친절한 목소리로 날 깨워준다. 약간은 불친절했던 프랑스 열차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독일인의 친절한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탑승한 야간열차는 영어바보인 나에게 살짝 괴로운 공간이었다. 같은 방 영국인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왈라쏠라를 하지만 얼어버린 내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수능영어의 비극이랄까? 

 

졸린 눈을 비비며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독일의 풍경을 마주했다. 멀리 초원을 배경으로 자욱한 안개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에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독일은 철강과 전쟁 등 냉철한 이미지의 국가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새벽을 지닌 풍경에.... 아마도 난 그때 독일이라는 나라에 첫 눈에 반했던 것 같다. 새벽안개가 고요히 어루만지는 고요한 초원의 침묵은 설렘보다는 온화함을 줬다. 내릴 채비를 갖추고 홀딱 반해버린 눈동자로 끊임없이 창밖을 주시했다. 이곳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대지였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동화다.

 

 

 

 

 

새벽안개가 사라지고 아침 햇살이 능글맞게 웃자, 열차는 이내 아우크스부르크의 플랫폼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본래 계획은 전 정거장인 울름이었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날 용기가 없어 7시에 도착하는 아우크스부르크로 선택했다. 대부분 승객들은 뮌헨으로 가기에 소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에 하차하는 승객은 몇몇 없었다. 열차에서 내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듬뿍 마신다. 그리고 열차와 나는 각자의 길을 향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중앙역 Augsburg HBF       노란 겨자를 발라놓은 듯한 역사는 맑은 하늘과의 색감 조화를 이룬다. 하루 일과를 준비하려는 분주한 시민들을 보니 이제 아침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아침의 분주함을 바라보며 독일 최고의 브랜드는 역시 근면성실임을 깨닫는다. 세계대전 후 파괴되었던 이 도시가 이처럼 깔끔하게 복원된 것도 이들의 근면성실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기적'을 일으키는 나라인가 보다.

 

 

 

 

 

구름이 예쁘게 핀 화창한 도시에서 소풍을 즐긴다. 새들도 바람소리도 도심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상쾌함은 홀로 여행자의 고독의 좋은 벗이 된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도심이 곧 공원이다. 나는 한적한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으며 도시소풍을 즐긴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본래 트리어 Trier와 함께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도다. 로마제국시절 아우크스투스 황제에 의해 도시가 조성되었다하여 아우크스부르크로 명명되었다. 유럽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상업 도시로 큰 번성을 누렸지만, 전쟁이 있을 때마다 상흔도 피해갈 수 없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들은 당시 거리의 바닥만 남고 대부분 지워졌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도시는 일부 복원되었고, 일부는 공원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독일도시에 비해 녹음이 짙다. 

 

 

 

 

 

 

막시밀리언거리 Maximilian Str       좁은 골목길을 방황 중 막스밀리언거리가 나타났을 때 마치 동화가 길 뒤편에 숨어 있다가 짠~하고 나타난 느낌이었다. 순간 극도의 흥분된 에너지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 거리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척추다. 성 울프리&아프라교회, 세츨러궁전, 대성당, 시청 등 살아있는 도시의 역사가 거리에 남아있다. 거리 바닥의 돌들이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들이라 눈길을 끈다. 광장 중심에는 헤라클레스분수와 머큐리분수 등 다양한 분수가 파스텔 톤 건물과 함께 평화로운 자태로 물을 뿜어내지만, 도시의 역사는 칼을 든 동상처럼 투쟁이었다.

 

 

 

 

 

성 울리히&아프라 St. Ulrich und Afra Basilika       막시밀리언 거리 끝자락에 인류 종교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교회와 성당이 공존중이다. 마틴 루터의 루터파는 이 도시에서 로마카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로마카톨릭의 부정부패에 불만이 많았던 이곳 제후, 귀족, 주민들은 루터파를 지지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를 통해 루터의 개신교도 정식종교로 인정받음으로써 로마카톨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길을 걷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그리스도계는 신교와 구교라는 재질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성 울리히 루터교회 (앞편의 작은 교회) & 아프라 성당(뒷편의 큰 성당)은 종교화합의 상징이다. 종교개혁 때 파괴되었던 성당을 카톨릭과 개신교의 화해기념으로 성당과 교회로 재건축했다. 이곳에는 그리스도교의 성인인 성 울리히와 성 아프라의 석관이 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갈등보다 심각한 것이 종교 갈등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그 갈등이 생명의 존엄성보다 우위에 놓일 순 없다. 십자군원정, 마녀사냥, 면죄부 판매와 같은 종교죄악은 두 번 다시 역사에 등장해선 안 된다.

 

 

 

 

 

푸거 도시 궁전 Fugger Staatplast       중세시절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서 막대한 재산을 축척한 대부호 푸거가문이 건립한 궁전(?)이다. 궁전 외관이 아닌 화려한 고택 외관이라서 사실 찾기가 의외로 어려웠다. 일반인이 궁전(?)을 소유했다는 점은 당시 푸거가문이 제후보다 더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푸거가문과 벨저가문의 등장은 아우크스부르크를 금융의 도시로 번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셰츨러궁전 Schalzer Palais       18세기 로코코양식으로 귀족들의 공간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이곳은 근대독일회화를 전시한 주립회화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이곳에 와야 할 이유는 '축제의 방'이다. 축제의 방은 마치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는 듯 샹젤리에와 금으로 치장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곳은 역사적인 특징이 있다. 왕이 아닌 귀족이 궁전을 만들어서 화려한 공간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 강력한 왕권보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귀족들의 힘과 결속력이 강했다는 근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 도시가 당시에 상업으로 매우 번성한 도시였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시청사 Augsburg Rathaus (왼편)과 페흘라흐 탑 Perlach turm (오른편)       시청사와 페흘라흐탑은 돔지붕에 동양적인 감성이 느껴져서 약간은 이슬람세계에 온 듯 이색적이었다. 왠지 친구처럼 보이는 두 건물은 2차 세계대전의 화마로 파괴된 후 다시 재건되었다. 시청사 3층에는 황금의 방있다. 온통 금과 명화로 장식되어 화려하기 그지없으니 아우크스부르크의 부유했던 옛 명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시청 앞 광장 중세와 현대가 동화되어 있다. 어깨동무하며 밀착되어 있는 건축물들에서 왠지 친밀감이 느껴진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빈틈이란 없다. 그래서 골목길의 부재라는 독특한 풍광을 연출한다. 그렇게 깔끔하게 단장된 도로 위로 여유로운 향기가 불어온다. 

 

 

 

 

 

푸거라이 Fuggerei       이곳은 독일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당시 유럽 최대 갑부였던 푸거가문의 야곱 푸거(Jakob Fugger der Reiche, 1459~1525)는 가난한 시민들을 위해 무료에 가까운 임대주택단지를 건설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 임대주택단지다. 다만 입주에는 조건이 있었다. 아우쿠스부르크 시민 중 부채가 없는 카톨릭 신도여야 했다. 하루에 3번 기도는 푸거가문을 위한 기도는 필수며 밤 10시가 되면 모든 문을 닫을 만큼 금욕적인 생활이 조건이었다.

 

2차세계대전 때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푸거재단이 복원했다. 현재 67개의 저택과 성당에 140가구가 혜택을 받고 있어 '도시 안의 도시'로 불린다. 연간임대료는 상징적인 의미로 500년과 똑같은 0.88€다. 다만 과거와 달리 관리비가 개인부담이라고 한다. 관광객 입장료는 연간임대료보다 비싼 4€!! 하지만 저렴한 금액이며 부족한 관리비로 기부된다니까 기분 좋게 지불하고 입장하자.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황제나 귀족들의 화려했던 이야기만 조명하게 되는 것 같다. 화려했던 상업도시였던 아우크스부르크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화려함 이면에 스며든 나눔의 미덕과 서민들의 삶을 이곳에선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더불어 이곳 출신인 모차르트 가문의 흔적은 소박한 팁이다. 화려하던 소박하던 무엇을 보던 누군가의 오래된 이야기들은 솔깃한 흥밋거리가 되는 걸 보니 괜한 오지랖인가 싶다. 우리집 전세값 어쩔꺼냐며.......T_T;;

 

     info  홈페이지 www.fugger.de

 

 

 

 

본 포스팅은 코레일기자단 4기로 송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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